* 종이우산 *
1. Rain # 1
여전히 "Hard To Say I'm Sorry"가 흐르고 있었다.
"누구나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얘기했지요.
사랑하는 연인들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서로 멀리 있는 시간도
나를 안아줘요.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하기 어렵군요.
................................"
카페"칸타타"엔 내가 찾지 않았던 시간동안에도 여전히 그노래가 흐르
고 있었던건지도 몰랐다.
나는 항상앉았던 카운타 맨 끝자리에 앉고, 벽에 등을 붙이고나서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스무살정도의 커플이 한쌍, 담배를 줄곳 피워대는 여자가 한명, 얼룩무
늬 군복을 입은 군바리가 세명, 그들 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나는 밀러를 주문하고 나서, 책을 꺼내들고 느긋하게 시카고의 노래를
들었다.
낯익은 바텐더가 내앞에 와서는 반색을 하며 맥주를 가져다 주었다.
"이번엔 무척 오랫만이군요. 1년만이죠? 혼자왔어요?"
"1년? 그래요.그렇군요. 1년만이네요. 여기도 조금 변한것 같네요."
"후...애들 입맛에 맞출려니 변하지 않을수가 있어야죠."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잠시만하는 손짓을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져서 핸드백안을 뒤적여봤지만 담배는 잡히지 않
았다. 아마도 차안에 두고 그냥 내린모양이었다.
"저 담배있나요?"
"네. 마일드세븐이랑 말보로가 있는데요."
세상에 요즘은 어딜가도 마일드세븐이나 말보로밖에 없다. 항상 디스를
피우는 내겐 참으로 고역스럽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망할놈의 마일드세
븐.망할놈의 말보로...
하지만 빗속을 걸어서 차안을 뒤적여 담배를 찾는것보단 망할놈의 마일
드세븐이라도 피워야했다.
마일드세븐...그는 항상 망할놈의 마일드 세븐을 줄곳 물고 있었던 것이
다.
1993년 겨울, 우리들은 겨울처럼 추운 스물둘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6시. 하지만 15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사실
말이지 카페도 아닌 건대역안 즉석사진촬영소앞에서 만나기로 한게 애초
에 잘못된건지도 몰랐다. 삐삐가 있는것도 아니고 연락할수 있는 전화도
없는 바에야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로서는 어찌할수가 없는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초초해 하는 표정이 나타나면 어쪄나하는 생
각에 난 시스템수첩을 펼쳐서 지하철 노선표를 보는척하며 두리번거리지
조차 않았다. 하지만 벌써 20분이나 지나버린것이다. 나쁜놈.
"뭘들여다 보고 있니? "
미안한기색조차 없는 정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어쪄랴
이런녀석을 믿고 더블캐스팅을 하지 않은 나의 불찰인것을...
화조차 내지못한채 그에게 끌려서 소주방에 갔을땐 그와과 만나기로 한
걸 다시 한번 후회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더블캐스팅을 한것이다
스무살도 채 되자않은것같은 기집애 하나가 담배를 빡빡피워대며 우리쪽
을 향해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던것이다.
붙인 속눈썹하며 금방이라도 궁뎅이가 보일것같은 미니스커트에 짧은 파
마머리는 앞머리에 부분염색을 하고 있었다.대조적인 캐스팅이었다.
난 그때 웨이브진 긴머리에 목과 소매에 털이 달린 검은색니트에 판타롱
을 입었으니 그는 특별난여자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셔요? 대구서 오셨다면서요? 서민정이라고 해요!"
괜히 머뭇댔다간 괜한 오해를 받을게 분명해서 인사를 하고 셋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어느새 민정이와 난 격의 없이 친해져버렸다.
첫인상과는 달리 민정인 굉장히 솔직하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물론 정우
와 특별한 사이만 아니라면 좋겠지만...
술자리에서 만나면 쉽게 친해진다던가? 술잔이 오고간 만큼의 정이 들어
가고 있었고 다른테이블의 남자들은 그를 부러운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
지만 사실 정우는 우리둘사이에서 마치 물위에 뜬 기름처럼 혼자 겉돌고
있었다.쉴새없이 피워댄 담배꽁초가 재털이위에 팥빙수처럼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래도 담배가 모자라는지 담배를 다시 시켰다. 마일드세븐이었
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말고 비비적거리며 눌러꺼버린채 우리들에게 시위
라도 하듯이 두손을 들어보이며 일어설듯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때야 우린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 야~ 이거 내가 개밥에 도토리잖아. 둘이 놀던지 맘대로해."
"아이~오빠.뭘 질투씩이나 하고 그래. 내가 눈치없이 괜히 오래있었군?
나 고만갈께. 담에 봐요 언니!"
사실 서울에 온건 친구결혼식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정우를 만나러 온것
이다. 하지만 정우는 다른여자애랑 히히덕거리느라 20분씩이나 날 기다
리게 했다. 하지만 나두 양심에 찔리는 점이 전혀 없지 않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래. 오빠랑은 잘만났어? 내가 서울역에 마중나갈려고 그랬는데..."
"응. 내가 좋아하는 순대볶음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참 그런데 마중나
온 사람 울오빠 아니었어. 서울에 사는 남자친구였지.메롱!"
"뭐? 너 그러면서 나한테 거짓말했지? 오빠가 마중나오기로 했다고 마중
나올필요없다구?"
"후후~ 근데 아까 건대역까지 그애가 데려다줄때 난 울오빠 만나러 간다
고 그랬어. 그러니깐 니가 내오빠가 되는 샘이지?"
"세상에 졸지에 내가 네 오빠가 되는군~"
"그래 오빠 우리 결혼 피로연이나 갈까요?"
정우와 함께 결혼피로연을 하는 강남의 "씨에스타"에 갔을때 다른 한사람
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