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반지/이런저런이야기
960828
종이반지
2012. 1. 6. 21:18
1996년 8월28일 (수) 보슬비
*오전 내내 집에서 뒹굴다.(잡지보고 신문읽고 요리정보메모)
*오후3시 가게 -> 오후 7시30분 퇴근 -> 정숙이네 집앞카페
-> 10시40분 집
가을이다. 아직 8월의 달력 그림속은 작열하는 바다며 벌거벗은
여자가 태양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데 이미 가을이다.
외로움을 빙자하여 바람난 눈빛으로 거리를 싸돌아 댕기는 사람들
을 만나게 되면 가을이 온것이다.
나도 외롭다. 그리운 사람이 있어도 많이 외롭다. 늘 기다리기만
해야하는 나는 바람난 눈빛이 아니어도 외롭다.
여름내내 하루에 몇장씩 읽다만 신경숙의 "외딴방"을 오늘에야 겨
우 첫권을 읽고 두번째 책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책장을 열지 못
했다. 아마도 가을내내 몇장씩읽다가 겨울을 느낄쯤에야 책장을
닫을수 있지 않을지...
요즘은 책을 펼쳐도 내내 눈만 활자위를 달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읽어야만한다. 온통 정신이 어디가 있는건지 책은 혼자 펼쳐진
채이고 커피는 어느새 식어있다.
그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살것만 같아서 전화를 해봤지만 나중에 다시
하세요 라는 말만 되돌아 왔다.
그이후 화가 난것도 아니며 슬픈것도 아니며 불안한것도 아닌데 이
유없이 신경이 칼날처럼 꼿꼿하게 날이 선채로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내몰았다.
그리고 내내 울리지 않는 삐삐를 확인하고 걸데도 없으면서 괜스레
공중전화 주변에서 맴돌고...
96년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은희경씨의 "빈처"에 나오는 말들이
떠올랐다.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
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뿐이
다."
하지만 난 그 남루한 일상조차도 그립다. 그가 없어서 많이 슬프고
많이 서러우며 발가벗겨진채 거리로 내몰린 것처럼 춥기만 하다.
이러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 혼자 할수 있는걸 생각해보자.
김대중 살리기가 아니라, 김은경 살리기를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혼자 영화라도 볼까? 아니면 공원에서 혼자 책보며 도시락이라도 먹
을까? 편의점에서 잡지보고 커피라도 마실까?
일단 보고 싶은 비디오라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서든데쓰" "디아볼릭" "비포선라이즈" "포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쎄베지" "일루션"...,
아니면 운동을 할까? 아니면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걸어볼까?
이 주체할수 없는 자유때문에 난 아마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혼자인게 싫어서 사람을 만나도 정신없이 쉬지않고 수다를 떨고 돌아
선후에는 처음보다 더 가슴속이 허하다.
그와 통화를 하면 괜스리 퉁퉁거리고 심술부리고 강짜를 부린다.
보고싶어서 미칠지경인데도 내내 성난 벌처럼 쏘아대고 있다.
며칠동안 냉동실에 들어가서 그가 올때까지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내가 들어갈 냉동실이 없다, 이세상에는...